상단여백
HOME 뉴스 문화·교육 小泉의 1분 古典
小泉의 고전한마디입과 귀로하는 학문이 아닌 실천하는 학문이다
예천뉴스 | 승인 2019.10.12

不是口耳之學的(부시구이지학적) 實踐之學(실천지학)

약포(藥圃) 정탁 - 南冥學연구총서

【 입과 귀로하는 학문이 아닌 실천하는 학문이다 】

경상북도교육연구원장(전) 小泉 趙 春 植

약포 정탁은 조선중기 1526년(중종21년) 10월 8일 경상도 예천군 금당곡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자정(精), 호(號)는 약포 또는 백곡(栢谷)이요 본관은 청주로 정이충과 평산한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천성이 관대하고 형용이 온수 민첩하여 부지런하였다.

1542년 17세의 나이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심학(心學)의 요전(要詮)을 얻어 들었는데, 구이지학(口耳之學)이 아닌 實踐之學(실천지학)에 공을 들였다. 퇴계의 문하에 있으면서 특히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을 매우 좋아하였고, 경학(經學)이외에도 천문, 지리, 상수, 병가 등의 학문도 두루 섭렵하였다.

1558년 33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에 배치되었다가, 1561년 진주교수로 옮겼다. 이 때 남명 조식을 찾아가서 제자가 되었다. 남명에게서 벽립천인(壁立千仞)의 기상을 보고 배웠다. 1963년 내직으로 들어와 성균관 박사로부터 공조, 예조, 형조, 이조, 병조판서 등 五曹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선조22) 우의정에 제수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592년 4월 왜적이 침입해 오자 우의정으로서 어가를 호종하여 서쪽으로 피난 갔다. 개성, 평양, 성천을 거쳐 의주에 까지 이르렀다.

약포는 주로 명나라 장수들과의 작전 관계의 일을 맡아 처리하였고, 후일 피난 중 의주에서 있었던 일과 명나라 장수들과 주고받은 문서와 논의한 것을 기록한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을 지었고, 용사일기(龍蛇日記)도 썼다.

1593년 가을 어가가 서울로 돌아온 이후로 약포는 전주, 공주 등 각지를 다니며 군사를 훈련시키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였다. 1594년 선조 임금의 명에 의하여 곽재우, 김덕령 등 많은 인재를 추천하고 1597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와 내통했다는 누명을 쓰고 체포되어 국문을 받고 있을 때, 약포가 헌의하여 감사(減死)의 처분을 받게 하였다.

1600년(선조33) 고향에 머물고 있을 때 좌의정에 올랐고 1603년 영중추부사로 승진되자 치사(致仕)하여 1604년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리고 1605년 9월19일에 고평리에서 별세하였다. 1613년(광해군5)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35년(인조13) 정간(貞簡)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00년(숙종26) 사림에서 도정서원(道正書院)을 세워 향사(享祀)하였다.

영의정을 지낸 동고(東皐) 이준경은 약포를 보고 “용모가 암룡과 같으니, 뒷날 반드시 크게 귀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한대로 그는 당쟁에 관여하지 않고 오직 옳은 길만 추구하여 선조의 깊은 신임을 얻었으며, 선공후사의 실천지학으로써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시끄럽고 부끄러운 세상이지만 오늘 만큼은 예천인의 한 사람됨이 더욱 자랑스럽다.

예천뉴스  webmaster@n161.ndsoftnews.com

<저작권자 © 예천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예천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카메라고발
여백
예천뉴스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경북 예천군 예천읍 군청앞길 6  |  대표전화 : 054-655-5350  |  팩스 : 054-655-5351
등록번호 : 경북,아00135   |   등록연월일: 2010년 7월 23일   |  발행.편집인 : 이태현  |  대표자 : 이태현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태현
Copyright © 2019 예천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ynews123@hanmail.net
Back to Top